황건적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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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건적의 난은 후한 말기 부패한 정치와 자연재해로 인한 사회 불안 속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이다. 장각이 이끄는 태평도를 중심으로 수십만 명의 신도가 봉기를 일으켰으나, 한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 왕조의 붕괴를 가속화시키고, 군벌 할거 시대를 열었으며, 삼국지 등 다양한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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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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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분쟁명 | 황건적의 난 |
부분 | 후한 말기 |
시기 | 184년 3월 4일–205년 |
장소 | 중국 전역 |
결과 | 황건적의 난 진압 후한 쇠퇴 중국 혼란 시작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후한 |
교전국 2 | 황건적 |
지휘관 및 지도자 (후한) | |
지휘관 | 영제 |
지휘관 및 지도자 (황건적) | |
지휘관 | 장각† |
병력 규모 | |
후한 | 약 35만 명 |
황건적 | 약 200만 명 (초기 장각 추종자 36만 명) |
피해 규모 | |
관련 항목 | |
관련 전투 | 양성 전투 |
2. 배경
후한 말, 환관의 전횡으로 인한 부패한 정치 상황은 백성들의 삶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미신적인 민간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현세구제를 추구하는 종교가 유행하는 토대가 되었다.
184년경, 한나라 중앙 정부는 궁중 환관들이 황제를 이용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부를 축적하면서 약화되었다. 특히 권력이 강했던 12명의 환관은 십상시로 불렸으며, 영제는 "상시 장양은 나의 아버지요, 상시 조충은 나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5] 이러한 정부의 부패는 역병, 자연재해, 농업 생산량 감소의 원인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황제가 천명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황하의 홍수로 인해 농민과 군사 정착민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노동력 과잉과 그로 인한 착취가 심화되었다. 171년, 173년, 179년, 182년, 185년에는 질병이 발생했는데, 이는 165년에서 180년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퍼져나간 안토니누스 역병(천연두 또는 홍역)의 영향으로 추정된다.[5]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도교 지도자 장각은 약수와 죽간 연주를 제공한다는 주장을 통해 추종자들을 모았고, 반란을 준비하기 위해 제자들을 중국 북부 전역에 파견했다.[5]
2. 1. 정치적 혼란
환관의 전횡으로 인한 부패한 정치 상황에서 백성들은 더욱 곤궁해졌다. 이러한 상황은 미신적인 민간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현세구제를 추구하는 종교가 유행하는 배경이 되었다.184년경, 한나라 중앙 정부는 궁중 환관들이 황제를 이용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부를 축적하면서 약화되었다. 특히 권력이 강했던 12명의 환관은 십상시로 불렸으며, 영제는 "상시 장양은 나의 아버지요, 상시 조충은 나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5] 정부의 부패는 역병, 자연재해, 농업 생산량 감소의 원인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황제가 천명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황하의 홍수로 농민과 군사 정착민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노동력 과잉은 착취로 이어졌다. 171년, 173년, 179년, 182년, 185년에 질병이 발생했는데, 이는 165년에서 180년까지의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천연두 또는 홍역이 실크로드를 따라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5]
도교 지도자 장각은 약수와 죽간 연주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며 추종자들을 모았고, 반란을 준비하기 위해 제자들을 중국 북부 전역에 파견했다.[5]
2. 2. 사회, 경제적 문제
환관의 전횡으로 부패한 정치 상황에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이러한 상황은 현세구제를 내세우는 미신적인 민간신앙이 유행하는 배경이 되었다.184년경, 한나라 중앙 정부는 궁중 환관들이 황제를 이용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부를 축적하면서 약화되었다. 영제는 "상시 장랑은 나의 아버지요, 상시 조중은 나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5] 정부의 부패는 역병, 자연재해, 농업 생산량 감소의 원인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황제가 천명을 잃었다는 것을 반영했다.
황하의 홍수는 농민과 군사 정착민들을 남쪽으로 이동시켰고, 이는 노동력 과잉으로 인한 착취를 심화시켰다. 171년, 173년, 179년, 182년, 185년에는 질병이 발생했는데, 이는 165년에서 180년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퍼져나간 안토니누스 역병(천연두 또는 홍역)의 영향으로 추정된다.[5]
이런 상황에서 도교 지도자 장각은 약수와 죽간 연주를 제공한다는 주장을 통해 추종자들을 모았고, 반란을 준비하기 위해 제자들을 중국 북부 전역에 파견했다.
2. 3. 태평도의 확산
장각은 후한 영제 때에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 칭하고 황천(黃天)의 신의 사자라고 일컬으며, 병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홉 마디가 있는 지팡이를 짚고 설교하며, 170년대 초부터 제자들을 사방에 파견하여 포교에 힘썼다.[5] 이러한 가르침은 빈곤과 질병의 공포, 불안을 느끼던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10여 년 만에 화북의 동반부에서 양쯔강 유역에 걸쳐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어 거대한 종교 조직으로 성장했는데, 이 교단의 이름이 바로 태평도(太平道)이다. 태평도는 주술에 의한 병 치료를 중심으로, 한나라 시대에 유행했던 참위설, 음양오행설 등과 민간 신앙을 결합하고 도가의 설로 윤색한 것이다.장각은 이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했는데, 이 조직은 빈민의 반권력적인 성격과 결합하여 군사적인 조직이 되기도 했다.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하며 최고위에 앉고, 두 동생 장보(張寶)는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張梁)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칭했으며, 1만 명 전후의 신도로 이루어지는 방(方)의 책임자로는 장각의 제자가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신도로부터는 사(師)라 불림과 동시에 방은 그대로 장군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태평도는 후한 정부에 큰 위협이었다. 정부는 탄압을 통해 해산시키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신도들의 단결과 교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반권력적인 성격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7] 장각은 한나라 전역에 걸쳐 봉기를 일으키려 했지만, 준비가 되기 전에 계획이 발각되었다.
冀州鉅鹿郡의 장각은 『태평청령서(太平清領書)』를 바탕으로 도교적인 회과(悔過)를 통한 치병(治病)을 행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산에서 약초를 채취하던 중 남화노선(南華老仙)을 만나 『제민요술(濟民要術)』이라는 천서(天書)를 받고 요술을 익혀 치병을 행하며 태평도를 펼쳤다고 한다.
장각은 도교의 신앙 치유를 통해 환자들에게 죄를 고백하게 함으로써 병을 고친다고 주장했다. 장씨 형제는 새로운 60갑자 순환 주기의 시작인 ‘갑자’년에 곧 닥칠 종말론적인 변화를 믿었고, 이는 새로운 통치를 알리는 노란 하늘을 의미하며, 그들의 두건 색깔에 영감을 주었다.[7] 환각, 금식, 음악 공연, 염불, 향 사르기, 설교와 같은 종파의 공동 활동을 통해 추종자들은 민족과 성별의 경계를 넘어 하나가 되었다. 흉노의 여러 지도자들, 예를 들어 유복로와 같은 자들이 그들의 지지를 보냈는데, 이는 장각이 그들의 샤머니즘적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8]
이를 통해 대중의 신앙을 장악하고 정치적 색채를 짙게 해 나간 태평도는 수십만 명의 신도를 36개의 단위로 나누어, 한 단위를 “방(方)”이라 칭하며 군사 조직화했다.
그리고 무장 봉기를 계획한 장각은 한(漢) 왕조의 전복을 암시하는 “”(창천(蒼天)은 이미 죽고, 황천(黃天)이 마땅히 설 것이다. 때는 갑자(甲子)년에 있으니,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라는 슬로건을 유포하고, 관청 문 등에 “갑자(甲子)” 두 글자를 적어 봉기를 호소했다.[73][74]
3. 경과
184년 장각은 도교의 일파인 태평도를 기반으로 한나라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장각은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하여 군사적인 조직을 갖추었고, "창천(蒼天) 이미 죽고, 황천(黃天) 마땅히 설 것이다. 세는 갑자(甲子)에 있으니, 천하 대길(大吉)이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73][74] 이는 푸른 하늘을 상징하는 한나라가 망하고, 누런 하늘을 상징하는 자신들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의미였다.
장각은 184년 갑자년에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마원의를 낙양(洛陽)으로 보내 중상시(中常侍) 봉서(封谞)·서봉(徐奉) 등과 내통하게 했다. 그러나 제자 당주(唐周)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되어 마원의는 처형당했다. 이에 장각은 예정보다 일찍 봉기를 일으켜, 스스로를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하고, 동생 장보(張寶)·장량(張梁)을 각각 지공(地公), 인공장군(人公將軍)으로 삼았다.
영제는 하진(何進)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황포숭(皇甫嵩), 여강(呂強) 등의 건의에 따라 당고의 금(黨錮の禁)을 풀어 청류 지식인들을 회유하고, 노식(盧植), 황보숭, 주준(朱儁)을 파견하여 황건적을 진압하게 했다.
3. 1. 봉기 계획과 초기 전개
170년대 초부터 장각은 제자들을 사방에 파견하여 포교에 힘썼고, 그 결과 태평도는 10여 년 만에 화북 동반부에서 양쯔강 유역에 걸쳐 수십만 명의 신도를 가진 거대 교단으로 성장했다.[10][7] 태평도는 주술을 통한 질병 치료를 중심으로, 참위설, 음양오행설 등 민간 신앙과 도가 사상을 결합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장각은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했는데, 이는 군사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다. 장각은 스스로를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하고, 동생 장보는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칭했다. 각 방의 책임자는 장각의 제자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신도로부터 '사(師)'라고 불림과 동시에 방의 이름으로 불렸다.
태평도의 성장은 후한 정부에게 큰 위협이었고, 정부는 탄압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신도들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장각은 '푸른 하늘'인 한나라 대신 '누런 하늘'의 세상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봉기를 선동했다.
당초 반란은 고위층의 부패와 민생의 어려움으로 인해 일어났으나, 장각은 스스로 천공장군을 자칭하며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을 품었다.
반란이 시작되기 전, 장각은 마원의를 형주와 양주로 보내 추종자들을 모으고 예(鄴)에 집결시켰다. 마원의는 낙양을 자주 드나들며 십상시의 일원인 풍서와 서봉을 포섭하여 장각과 협력하게 했다. 이들은 184년 3월 3일을 반란일로 정했으나, 태평도 창립자 중 한 명인 당주가 마원의를 고발하면서 계획이 발각되었다. 마원의는 체포되어 능지처사형을 당했다.[10][7]
반란 계획이 발각되자 장각은 즉시 연락을 취해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184년 3월 4일, 장각은 36만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봉기하여 스스로를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하고, 그의 형제 장보와 장량은 각각 "지공장군"(地公將軍)과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불렀다. 반란군은 관청을 공격하고 마을을 점령하며 여러 군(郡)을 장악했다. 10일 만에 반란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낙양의 한나라 조정을 크게 놀라게 했다.[13]
반란군은 주로 기주, 영주, 유주, 예주 지역에 집중되었다. 장각과 그의 형제들은 기주 거록군(오늘날 허베이성 싱타이시 핑샹현 부근)과 위군(오늘날 허베이성 한단시 부근)에서 지지를 얻었다. 두 번째 주요 봉기는 유주의 광양군(오늘날 베이징시 부근)과 탁군(오늘날 허베이성 줘저우시 부근)에서 일어났다. 세 번째 반란의 중심지는 예주의 영천군(오늘날 허난성 쉬창시 부근)과 여남군(오늘날 허난성 신양시 부근), 그리고 영주 북부의 남양군(오늘날 허난성 난양시 부근)이었다.
184년 4월 1일, 영제는 하진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고 황실 군대를 지휘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14] 또한 노식, 황보숭, 주준에게 군대 약 4만 명을 주어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15] 노식은 기주에 있는 장각의 근거지를 공격했고, 황보숭과 주준은 영천군으로 향했다.[16]
3. 2. 주요 전투
후한 영제는 황건적의 난에 대한 대책을 대장군 하진과 논의했다. 그 결과 노식, 황보숭, 주준을 장수로 임명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토벌에 참여했다.[15] 손견과 유비도 각각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합류했다.184년 3월 4일, 장각은 약 36만 명의 황건적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12] 그는 자신을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했고, 장보와 장량은 각각 "지공장군"(地公將軍)과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불렸다.[13] 반란군은 기주, 영주, 유주, 예주 등지에 집중되었다.
184년 4월 1일, 영제는 하진을 대장군으로, 노식, 황보숭, 주준에게 군대를 주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14][15] 이후 유주, 청주, 영천, 광종, 곡양, 양성, 완성 등에서 주요 전투가 벌어졌다.
3. 2. 1. 유주성 전투
184년, 유비는 의병을 일으켜 유주성으로 가 유주 태수 유언을 만난다. 얼마 뒤 황건적 대장 정원지가 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비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유주의 관군 대장 추정과 함께 유주성 앞 대흥산에서 대치한다.[18]정원지는 부장 등무를 내보내 맞서게 했으나 유비의 의형제 장비에 의해 베어진다. 이에 정원지는 직접 나서지만 오히려 유비의 의형제 관우에 의해 목이 베인다.[18]
대장 정원지가 쓰러지자 황건적들은 우왕좌왕하고 유비 삼형제는 황건적들을 무찌른다.[18]
3. 2. 2. 청주성 전투
유주성 전투 다음 날, 황건적에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청주 태수 공경의 편지가 도착한다. 유주 태수 유언은 교위 추정에게 군사 5,000명을 보내 유비와 함께 청주의 황건적을 무찌르게 한다. 청주성에 도착한 유비는 황건적들을 끌어들여 계곡으로 유인한 뒤 무찌른다.공경도 군사를 내어 황건적을 앞뒤로 포위해 무찌르고 유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유비는 광종으로 노식 장군을 도우려 가지만, 노식의 의견으로 1,000명의 병사들을 내주어 황보숭과 주준을 도와 영천으로 향한다.
3. 2. 3. 영천 전투
예주 영천의 산골 장사현에서 한나라 관군 대장 황보숭과 주준이 황건적을 토벌하고 있었다. 주준은 첫 전투에서 황건적의 대군을 이끌고 있는 파재와 싸웠지만 패배하고 장사에서 농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주준은 황보숭과 함께 장각의 동생 장량과 장보와 합류한 파재를 화공으로 공격해 무찔렀다.장량과 장보는 형 장각이 있는 광종으로 도주하였으나 도중에 조조를 만나 10,000명의 전사자를 냈고, 6월에는 팽탈의 황건군이 다시 격파되었다. 남은 황건적들은 예주 자사 왕윤이 이끄는 별동대와 관군의 협공으로 격파당하면서 예주의 황건적은 모두 평정되었다.
3. 2. 4. 광종 전투
184년, 노식이 뇌물을 거절하여 모함을 받아 중랑장 자리에서 해임되고 서량 자사 동탁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유비는 광종으로 가던 중 이 소식을 듣고 탁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유비는 노식에게서 받은 1,000명의 군사를 돌려보냈다.탁군으로 돌아가던 중, 유비는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에게 쫓기던 동탁을 도왔다. 그러나 동탁은 유비가 벼슬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했고, 결국 유비는 주준에게로 갔다.[48][49][50][51]
3. 2. 5. 곡양 전투
184년, 유비와 주준이 양성에서 장보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이 병으로 사망하여 황건적의 사기는 크게 떨어진다. 장각의 뒤를 이어 동생 장량이 황건적을 이끌었으나, 관군 대장 황보숭과 거록 태수 곽전은 황건적의 본거지 곡양을 기습 공격하고 기도위 조조를 앞세워 일곱 번 싸워 모두 승리한다.결국 장량은 곡양에서 전투 중 전사하여 목이 베인다.[37] 조정에서는 공을 세운 황보숭과 조조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 황보숭의 상소로 노식을 다시 중랑장으로 임명한다.
3. 2. 6. 양성 전투
184년, 후한 형주 남양 양성에서 유비와 주준이 이끄는 관군과 장각의 동생 장보가 이끄는 황건적이 대치했다. 이들은 치열하게 싸웠는데, 유비의 의형제 장비가 황건적 부장 고승을 베면서 황건적들은 양성으로 쫓겨 들어갔다. 이에 유비는 장기전으로 돌입하여 황건적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작전을 세웠다.유비의 작전은 성공하여 장보의 부장 엄정이 장보를 살해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했다.
전투 | 양성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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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84년 |
장소 | 후한 형주 남양 양성 |
결과 | 유비와 주준의 승리, 장보 전사 |
교전국 1 | 한나라 관군 |
교전국 2 | 황건적 |
지휘관 1 | 유비, 주준, 장비, 관우 |
지휘관 2 | 장보†, 고승†, 엄정 |
병력 1 | 유비 500명 |
병력 2 | 장보 9만 |
피해 1 | (정보 없음) |
피해 2 | 장보, 고승 사망, 엄정 항복 |
3. 2. 7. 완성 전투
184년 3월, 황건적의 주요 인물인 장만성(張曼成)이 이끄는 반란군이 후한 형주 남양군 태수 추공(褚貢)을 살해하고 군의 수도인 완성(宛城; 현재의 허난성 난양 시 완성구)을 점령했다.[41] 장만성이 죽은 후, 조홍(趙弘)이 완성에서 새로운 반란군 지도자가 되었다.184년 6월, 새로 남양 태수로 임명된 진걸(秦頡)은 장만성을 공격하여 죽였다.[42][43] 진걸과 주준(朱儁)은 형주 자사 서구(徐璆)와 연합하여 약 1만 8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완성을 공격했다. 그들은 조홍을 물리치고 죽였다.[44]
조홍이 죽은 후, 한충(韓忠)과 남은 반란군이 완성을 장악하고 황제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주준은 군대에게 남서쪽에서 공격하는 척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비밀리에 5,000명의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북동쪽에서 완성에 침투했다. 한충은 성채로 후퇴하여 항복을 요청했으나, 진걸, 서구, 그리고 주준 휘하의 장초(張超)는 모두 주준에게 한충의 항복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주준은 대신 포위를 해제하는 척하여 한충을 유인하여 공격하게 했다. 한충은 계략에 걸려 전투에서 패배하고 북쪽으로 도망치려 했고, 그의 부하 약 1만 명이 황제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절망한 한충은 주준에게 항복했지만, 진걸에 의해 처형되었다.[45]
185년 1월 11일, 주준은 손하(孫夏)가 이끄는 또 다른 반란군을 물리쳤고, 손하는 서악현(西鄂縣; 현재 허난성 난양 시 북쪽)으로 도망쳤다. 주준은 그곳에서 그를 추격하여 패퇴시켰고, 나머지 반란군은 흩어졌다.[46][47] 이로써 유비, 손견, 주준은 황건적 장만성, 조홍, 손중, 한충 등을 격파하고 난을 진압했다.
3. 3. 진압 과정
184년 4월 1일, 한 영제는 그의 매부인 하남윤 하진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반란 진압을 위한 황실 군대를 감독하도록 명령했다.[14] 영제는 또한 노식, 황보숭, 주준 세 장군을 임명하여 총 약 4만 명의 군대로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15] 노식은 기주에 있는 장각의 근거지를 공격했고, 황보숭과 주준은 영천군으로 향했다.[16]184년 4월, 주준은 영천에서 황건군의 파채와 격돌하여 패퇴하였고, 여남 태수 조겸은 사릉에서 황건군에게 패배하였다. 5월, 황보숭과 주준은 장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파채는 대군을 이끌고 이를 포위했다. 열세에 놓인 황보숭은 군대를 독려하여 화계를 사용하여 파채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장사를 쳐 나가 파채군을 패주시켰다. 거기에 원군으로 온 조조군과 합류하여 더욱 싸워 크게 격파하고, 추격하여 양적에서 파채군을, 6월에 서화에서 팽탈군을 각각 섬멸하고, 황건군의 별동대를 격파한 왕윤과 함께 예주를 평정하였다.
같은 4월, 광양의 황건군은 유주 자사 국훈과 광양태수 유위를 공격하여 죽였다. 6월, 기주에서 황건군을 연전연승한 노식 군은 장각이 광종에 성을 쌓고 틀어막자 이를 포위하고 공격하여 함락시키려 했다. 노식 군은 계속 우세했으나, 파견된 소황문 좌풍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을 사서 참소를 당해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대신 동탁이 파견되었으나 오히려 황건군에게 패했다.
8월, 영제는 예주를 평정한 후, 연주 동군에서 복기 군을 격파한 황보숭을 기주로 파견하도록 명령했다. 10월, 황보숭은 광종에서 황건군을 기습하여 장량을 죽였다. 이때 이미 장각은 병사했기 때문에 그의 시체를 끌어내어 내걸었다. 또한 거록태수 국전과 함께 곡양에서 장보를 격파하여 죽였다. 이로써 지도자를 잃은 황건군은 와해되었다.
185년 초, 주준이 남양군 완성을 탈환하고 황보숭이 기주에서 장각 형제를 물리치면서 반란은 대부분 진압되었다. 남은 산발적인 반군들은 정부군의 소규모 군사 작전으로 추격되었고, 185년 2월 중순, 영제는 광화에서 중평("평정 달성")으로 그의 연호를 변경하는 축하 선포를 발표하였다.[7]
4. 황건적의 난 이후
황건적의 난은 185년 2월에 주력 부대가 진압되었지만, 잔당들은 이후 20년 동안 소규모 반란을 계속 일으켰다.[60]
189년경, 장요(張饒)는 20만 명의 황건적 잔당을 이끌고 청주를 유린했으며, 북해(오늘날의 산둥성 웨이팡 부근) 태수 공융의 군대를 격파했다.[60] 이후 공융은 관해에게 포위되었으나, 태사자를 통해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유비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61]
200년대에 서화(徐和)와 사마구(司馬俱)는 각각 지난군(오늘날 산둥성 장추 부근)과 러안군(오늘날 산둥성 쯔보 부근)에서 황건적 잔당을 이끌고 청주를 유린했다. 이들은 206년에서 209년 사이에 하후연, 장패, 여건에게 패하여 죽임을 당했다.[62][63]
4. 1. 군벌 할거와 후한 멸망
황건적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각지에서 군벌들이 할거하면서 후한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조, 유비, 손견 등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2][7] 황건적 잔당들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활동하며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백파적(白波賊), 흑산적(黒山賊)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저항을 이어갔다.188년 산시성(山西)에서 백파(白波)의 적(賊)이 일어났고, 산둥성 방면에서는 칭조우(淸州)와 쉬조우(徐州)의 황건적이 맹위를 떨쳤다.[52][53] 192년 동탁 사후 청주에서 다시 수십만 명의 황건적이 봉기하여 포신과 유대가 전사하기도 했다. 조조는 이들을 토벌하고 30만 명을 항복시켜 청주병으로 흡수했다.[64][65][66]
194년 황건적 잔당 대장 관해는 청주의 북해를 습격했으나, 유비와 태사자에게 토벌되었다.[61] 이후에도 하의, 하만, 황소 등의 황건적 잔당이 조조에게 토벌되었다.
188년 3월 16일부터 4월 13일까지, 곽태(郭太)는 약 10만 명의 황건적 잔당을 이끌고 희허군(현재 산시성 펀양 부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백파곡(白波谷) 출신이었기에 백파적(白波賊)으로 불렸다. 이들은 흉노와 동맹을 맺고 태원군과 하동군을 공격했다.[54][55]
195년 중반, 한헌제(漢獻帝)는 장안에서 탈출하여 낙양으로 돌아왔다. 동승(董承)과 양봉(楊奉) 등은 백파적을 불러 헌제를 보호했다.[56][57] 195년에서 196년 사이, 조조는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許, 현재 허난성 서창)로 호송했다.
188년, 마상(馬相)과 조지(趙祗)가 이끄는 황건적 잔당은 익주(益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이승(李升), 조부(趙部), 희검(郗儉)을 살해했다. 마상은 스스로 황제라 칭했으나, 가룡(賈龍)에게 진압되었다.[58][59]
189년경, 장요(張饒)는 20만 명의 황건적 잔당을 이끌고 청주를 유린했다. 공융(孔融)은 유비의 도움으로 관해에게서 구출되었다.[60][61]
200년대에 서화(徐和)와 사마구(司馬俱)는 각각 진안군과 래안군의 황건적 잔당을 이끌고 청주를 유린했다. 이들은 206년에서 209년 사이에 하후연(夏侯淵), 장패(臧霸), 여건(呂虔)에게 패하여 죽임을 당했다.[62][63]
192년 5월경, 수십만 명의 황건적 잔당이 연주로 몰려들어 정수(鄭遂)를 살해하고 동평군으로 진격했다. 유대는 포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공격하다 전사했다. 조조는 제북국에서 반란군을 격파하고 30만 명이 넘는 항복을 받아 청주병을 조직했다.[64][65][66]
한나라 군대는 승리했지만, 주요 건물 파괴, 고위 관리 사망, 영토 분열 등의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반란군 사망자는 수십만 명에 달했고, 많은 민간인들이 집을 잃거나 궁핍해졌다. 심각하게 약화된 한나라는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고, 220년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군 지휘관과 지역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분산시켰다.[2][7]
189년 한영제(한령제) 사후, 하진과 환관들 사이의 권력 투쟁은 하진의 암살로 끝났다. 원소는 궁궐에 불을 지르고 환관들을 학살하며 보복했다. 동탁은 미성년 황제 유변을 장악했으나 192년 살해되었고, 이로 인해 조조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장각 등 지도부 사망 후에도 정치 부패로 인한 민중에 대한 혹정(苛政)은 개선되지 않았고, 황건군 잔당들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반란, 산적 행위 등을 저질렀다. 양봉과 한섬이 이끄는 백파적은 헌제의 낙양 귀환 시 후한에 귀순하여 이각과 곽사 등과 교전했다. 장연의 '''흑산적'''이 하북에서 할거했고, 청주 황건군 100만 명은 중국 북부를 황폐화시키고 공손찬에게 대패했다.
187년 장순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비는 토벌군에 종군하여 군공을 세웠다.
188년(혹은 185년), 익주에서 마상 등이 거병하여 극검을 살해했다. 마상은 가룡에 의해 토벌되었다.
192년, 연주 자사 유대가 전사했다.
량주와 같은 지역에서도 후한 정부의 통제가 약해져 한수 등이 반란, 자립, 항쟁을 반복했고, 이민족도 변방에서 약탈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치안 악화에 대비하기 위해 호족을 중심으로 촌락공동체 규모로 자위·자경을 위한 무장을 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많은 백성이 재난을 피해 형주, 양주, 익주, 교주 등 강남이나 사천의 변방 지역으로 이주하여 이들 지역의 문화 수준 향상과 개발을 촉진했고, 이는 삼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의 요인이 되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 군벌적인 세력이 다수 출현하여 군웅할거의 양상을 보였는데, 이들을 지탱했던 것은 황건적의 난에 의해 무장한 호족들과 광범위한 지역에 확산된 지식인들이었다.
4. 2. 사회, 문화적 영향
황건적의 난은 후한 말기 사회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난은 백성들이 겪는 고통과 이에 대한 저항 의식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또한, 이 사건은 삼국지연의와 같은 문학 작품의 주요 소재로 활용되었으며,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72]삼국지연의에서는 장각 형제가 남방의 선인(때로는 장자로도 불림)에게서 태평경을 얻어 마법을 부리는 것으로 묘사된다.[72] 소설 속에는 두원, 주창, 고승, 성원지, 등모, 변희 등 허구의 황건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료화는 실제 역사 속 인물이지만, 소설에서는 황건적 반란군 출신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의 사망 시기와 수명을 고려하면 역사적으로는 신빙성이 낮다.
황건적의 난 이후, 수많은 백성이 전란을 피해 강남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는 강남 지역의 문화 발전과 경제 성장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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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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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卷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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